(포항)갈 수 없는 곳도 있고, 작은 흔적조차 없는 곳도 있으니

- 일시: 2023-8-19~20
- 날씨: 비 온 후 안개 짙은 날
- 몇명: 홀로

 

 

 

동학을 창시한 이는 수운 최제우이지만 동학을 완성한 이는 해월 최시형이라는 평가를 합니다.해월(1827년,순조 27 ~ 1898년 6월 2일)은 조선후기 동학의 제2대 교주로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최경상(崔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경주 출신입니다.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머슴살이, 화전민으로서 생계를 꾸렸고 17세부터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고 해월은 무학자였습니다.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포항시 흥해읍 마북리로 옮겨 농사를 지었고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劍谷)으로 이주하였습니다.최수운은 해월이 무학자였지만 해월의 인간됨과 진실됨에 감동하여 도통을 승계했을겁니다.최수운이 체포되자 해월은 최수운의 고비원주(高飛遠走:높이 날고 멀리 달린다는 뜻으로 남이 모르게 종적을 감춘다는 뜻입니다.)하라는 유서대로 최보따리 도망자 시절을 보냅니다.도망을 다니는 가운데 동경대전을 간행한 후 용담유사까지 간행합니다.이후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을 펼쳤고 전봉준의 무력투쟁 봉기 이후 일본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자 다시 피신하면서 포교에 진력합니다. 향아설위(向我設位,제사하는 사람을 향해 제사상을 차려야한다. 천도교의 제사법으로제사상을 벽을 향해 차리지 않고 자손들을 향해 차리는 것을 이르는 .)·삼경설(三敬說,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세 가지 가르침.)·이심치심설(以心治心說)·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양천주설(養天主說)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고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303km

 

해월최시형선생님 어록비(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만석리 800-18)~기일제지소 터(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 542)~검곡(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651-1)~법광사지 ~냉수리고분~포항냉수리신라비~동학최초 조직 접주제 안내표지판(포항시 북구 흥해읍 매산리 636-67)~포항 우각리 여주이씨고택~영일 우각동 향나무~영일 냉수리고분~영일기천 고택~봉강재~분옥정

 

 

2023-8-19

해월최시형선생님 어록비(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만석리 800-18)

 

"사람을 대할때에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하라.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오.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일이 있으면 자리를 가리어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 공부를 하라......"

끝까지 읽고 보니 누가 해월을 무학자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세상 살면서 깨우친 지혜가 이미 동학의 2대 교주답습니다.

해월이 죽고 100년뒤인 1998년에 신광중학교 재학중인 이향미(동명이인을 알고 있는데...)의 글씨로 썼다는 내용입니다. 글씨는 여중생의 글이지만 아주 단아하고 옛날 교과서 인쇄본같은 글씨체여서 정감도 갑니다. 

기일제지소 터(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 542)

 

검곡에서 약10km 떨어진 신광면 기일基日(터일)에는 해월선생이 동학에 입도하기 전 일했던 제지소 터가 있다고 해서 찾아갑니다.제지소의 경험과 인맥은 훗날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학의 경전을 목활자로 찍어낼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을주민에게 물어보았지만 이미 예전에 제지소(한지를 만든 곳)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기일경로당과 뒤쪽 밭 사이의 계곡 근처(한지를 만들려면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을 해보았습니다.작은 표석 조차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빛이 산란하며 안개를 물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어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검곡(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651-1)

해월이 검곡에서 화전을 일구며 어렵게 살다가 경주 지방에서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도(道)가 퍼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해월 선생은 경주 용담정으로 찾아가 수운 대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입도를 하였습니다.70리길을 마다 않고 경주 용담정을 찾아 수운 대선사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검곡은 차를 타고가도 상당히 긴 거리입니다.

 

마북리 마을을 지나 포항 상수원 댐이 조성되어 빛이 안개속으로 산란하며 저수지 물과 산의 반영이 아주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도로에서 차를 세울수도 없고 차에서 내린다고 해도 나무가지들이 교차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틈새도 보이지 않아 결국 환상적인 그림은 놓쳐버리고 약간 시야가 확보되는 곳에서 뒤늦게 한 컷 셔터를 누릅니다.

2023-8-20

해월의 검곡 집터까지는 1시간을 더 올라가야 하는데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진입이 금지되어 있고 자물쇠마저 채워져 있어서 되돌아 나옵니다.

검곡(검등골)은 해월선생이 영적체험을 한 동학천도교의 중요 성지 중의 하나입니다만 우리는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곳 상수원 보호를 명목으로 출입금지 쇠사슬을 걸고, 해월 선생 유적이 있는 검곡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마저 치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냉수목욕을 중지하라"는 천어를 들은 계곡의 수련터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포항 마북리 느티나무(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마북리 90)

 

1982년 10월 29일 경상북도보호수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아마도 수령이 가장 오래된 이유로 보입니다.저수지 길 옆에 있는데 일명 '권씨 할배나무', 또는 '무자천손(無子千孫) 나무'라고도 합니다.유형은 당산목(堂山木)이며, 수령 700년, 높이 16m, 둘레 6.9m로 1999년 마북 저수지 공사로 인해 수몰 위기에 놓인 것을 지역의 민간단체가 4억 5000만 원의 경비를 들여 원래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200m 떨어진 산기슭에 옮겨 심었습니다. 500여 년 전 마을에 자리 잡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입향조가 신당(神堂)으로 모시기 위하여 심은 나무라고 전합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 주민들이 나무 밑에 모여 동제(洞祭)를 지내며 막걸리를 뿌리고 나무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옮기면서 원래보다는 크기가 작아졌다고 합니다.700년이면 대한제국 포함 조선왕조 518년 보다 깁니다.검곡은 느티나무 때문이라도 와야겠군요.

 

 

▷법광사지

포항 법광사지는 신라 진평왕(579~632)때 원효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하였다고 합니다.법광사 규모는 525칸으로 불국사와 맞먹는 수준의 신라 대가람이었습니다.철종 14년(1863)에 불에 타 없어진 뒤 몇몇 건물을 세웠으나 다시 불에 타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건축용 석부재와 석물들이 남아있는데 한곳에 모아둔 것만 보아도 원래의 규모가 상상이 됩니다.  

연화석불대좌가 보이는데 근처에 가서 보니 제법 규모가 큽니다.

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입니다.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多羅尼經)을 조탑경으로 삼은 유일한 석탑이라고 합니다.불정존승다라니경은 "악도惡道를 깨끗이 하는 경"입니다.

당간지주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세워졌고 1989년 4월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진이마촌의 절거리가 소유하였던 재산과 유산상속으로 다툼이 발생하자 갈문왕을 비롯한 중앙의 귀족들이 합의하여 다툼을 해결하였다는 내용이 공문서 성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귀족들이 나선점을 보면 당시 신라 왕권의 한계를 보여주고 신라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자료입니다.

동학최초 조직 접주제 안내표지판(포항시 북구 흥해읍 매산리 636-67)

마을의 당산나무 옆에 세워져 있습니다.1년전인 2022년 11월18일 만들어 세웠는데 이런 안내판 하나라도 있으니 너무나 좋습니다.접주제는 아마도 최수운이 주유팔로 시절 보부상 조직을 참조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근처에 제자 손봉조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각리 여주이씨고택

회재 이언적의 다섯번째 손자인 오의정 이의택 계열이 17세기 이후 이거하여 세거해 온 곳이라고 합니다.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우각동 향나무(오의재)

 

향나무는 400년 정도 되었는데 오의재 문은 닫혀져 있었지만 자물쇠가 없어서 밀어보니 열렸습니다.향나무는 건장한 거인이 팔을 벌린 것 같은 형상이었습니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뺏다하는 사이 노출 조리개가 돌아가서 사진이 시커멓게 나와 사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영일 냉수리고분

삼국시대의 이 지역의 수장층의 무덤으로 보이는데 용천 저수지와 도로 사이에 있습니다.

▷영일 기천고택

 

이 건물은 이승운이 건립했다고 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100여호가 넘던 전통 가옥이 모두 소실되고 이 마을에서 이 집만 유일하게 남았다고 합니다.문은 잠겨져 있었습니다.

 

▷봉강재

봉강재는 윤신달의 28대손인 윤광소가 파평 윤씨의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영조 27년(1751)에 지은 재실입니다.운신달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워 "벽상삼한익찬공신"이라는 훈공과 "삼중대광태사" 관직을 받은 인물입니다.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봉강묘(廟)라는 사당으로 가는 길 옆으로 가종 기념식수비 혹은 문중의 방문기 같은 비석들이 도열되어 있어서 이채로웠습니다.

옆에 봉강서원도 있습니다.

▷분옥정(噴玉亭)

조선 숙종때 성균생원이며 가선대부에 추증된 돈옹공 김계영의 덕업을 찬양하기 위하여 순조 20년(1820) 3월에 문중에서 건립했다고 합니다.용계정사라고도 불리는 분옥정은 주변 풍경을 고려하여 출입을 건물 뒷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류를 행하도록 배치했습니다.


분옥(
噴玉)은 "옥구슬을 뿜어낸다"는 뜻으로 아마도 계류의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물구슬이 튀는 모습에서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문이 잠겨 있어서 추사의 글씨,용계정사 편액도 보지 못했습니다.

만지송(萬枝松:가지가 만개라는 의미로 보임)이라는 소나무의 수형은 장중하고 수려합니다.

보호수 사이 돈옹공 김계영의 시비가 있습니다.

幽禽雲並宿 유금운병숙

淸澗月同流 청간월동류
獨夜彷徨久 독야방황구
誰志我思悠 수지아사유


---돈옹공 김계영 공의 시(詩)

새는 구름에 묻혀 고요히 잠이들고
산골짝 맑은 물은 달과 함께 흐르네
홀로 밤 지새우며 서성인지 오래이거늘
누가 시름 많은 내 마음을 알아주리

(전문. 10대 손 김종헌 번역)

* 원래 "새는 구름에..."로 시작하여 "새 추(隹)"로 유추했으나 돈옹공 11대 후손이 "幽(그윽할 유)"로 바로잡아주어 옳게 수정했습니다.

(필사)

 

해월의 흔적을 찾아서 여러곳 다녔지만 결국 약간의 흔적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고 현재 흔적이 있다고 해도 마음편하게 유적지까지 접근하기 힘든 곳도 있었습니다.

돌아와 유적지에 대한 아쉬움을 그가 남긴 언행에서 그의 사상을 읽어냅니다.

 

해월 최시형의 신관은 범신론적·내재적 경향을 띠어 하느님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나아가 만물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 것(以天食天)’으로 파악됩니다. 이런 신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삼경사상(三敬思想)이 도출되는데, 이는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사상입니다. 또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잘 길러나가는 것[養天主]이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라는 입장도 같은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동학의 하느님은 확실히 서학의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180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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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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